8,000km를 날아온 낯선 질문 : 예멘 난민 1년 보고서
모하메드 알가오다리
리한 하산 메효브 하다르
함자

인도적 체류허가



2014년 발발한 내전으로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은 전쟁터가 되었다.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사나와 함께 예멘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예멘인 300만명이 징집과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시사in 특별 기획
취재김연희김영화
사진신선영이명익조남진윤무영
그 중 561명이 2018년 제주도에 입국했다. 단 두 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거기가 어딥니까?”

2018년 이전만 해도 아크람 알자디(25)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크람은 2014년 2월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 장학금 제도에 합격해 한국에 왔다. 당시 체코와 인도가 지원하는 국가 장학금도 동시에 합격했지만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서울대학교에 진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7개월 뒤인 2014년 9월, 아크람의 나라 예멘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고국으로 돌아가 배운 걸 활용할 기회는 수년째 지속되는 전쟁으로 기약없이 미뤄졌다. 지난 2월 졸업한 아크람은 현재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사나
예멘의 수도
예멘 기본 정보
인구
2957만 9986명
(세계 50위)
면적
52만 7968km2
(한반도 2.4배)
언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수니파 65% : 시아파 35%)
소득 수준
국내총생산 : 182.1억달러
1인당 GDP : 660.28달러 (2016년 세계은행)
내전 피해 정보
난민
300만 명
사망자
최소 6872명
(2018년 11월까지)
부상자
최소 1만 768명
(2018년 11월까지)
기아 위기
1500만 명
(전체 인구의 50%)
굶주림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어린이
8만 4700명
콜레라 감염
110만 명

5년 넘게 한국에서 지냈지만 ‘차별받는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2018년 1~5월 사이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도로 입국한 561명의 예멘인에 대한 여론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아크람은 자신이 예멘인이라서 한국인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했다. 거리를 걷는데 모두가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직접적인 위협을 당한 것도 아닌데 며칠간 그랬다.

그동안 친절하게 대해주고 웃어주던 한국인들은 가짜이고 이게 진짜인 걸까. 한국은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구나.

얼마 전 아크람은 강화 교동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한 할아버지가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물었다. 주저하며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예멘에서 왔습니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어, 제주도!”

71만4875명. 지난해 6월 예멘 난민을 반대하며 난민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인원이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어서, 대부분 젊은 남성이라서, 무슬림이라서 ‘가짜 난민’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다. 예멘인 561명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첫 인사’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출도 제한 조치로 인해 제주에 발이 묶여 있던 지난해와 달리, 많은 예멘인이 제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까. 한국 사회와 접점은 만들었을까.

예멘 난민 국내 지역별 거주자 현황
자료 : 법무부, 2019년 3월 기준 (단위 : 명)
30
60
90
120
150+
1
전라도
155명
2
제주도
146명
3
경기도
54명
4
충청도
42명
5
서울
38명
6
기타
34명

취재는 쉽지 않았다. 지난 1년간 예멘인을 지원해온 활동가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드러나면 그 지역 주민들이 구청이나 시청에 민원을 넣고, 조용히 살던 사람들이 더 괴로워집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해서 그렇지 다양한 국적의 난민들이 이미 한국에 살고 있거든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갑자기 인식이 너무 나빠져버려서... 지원 활동도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2018년은 국내 난민 ‘전문가’라 할 만한 활동가들에게도 당혹스러운 한 해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난민 지원 전문 단체가 전무했다. 전국의 활동가들이 하던 일을 제쳐두고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 난민 지원이 금세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해 1만6173명이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는데, 제주로 입국한 예멘인은 ‘고작’ 561명이었기 때문이다. 전체 난민 신청자 기준으로 보면 예멘인 난민 신청자는 0.03%(484명)에 불과했다.

제주도 예멘 난민 심사 현황
자료 : 법무부, 2018년 12월 최종 결정
(사람 아이콘 1개당 4명, 총 484명)
난민인정
직권 종료
난민 불인정
인도적 체류 허가자
*인도적 체류 허가: 난민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지만 국적국으로 돌아가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이들에게 합법적 체류 자격을 부여. 1년마다 갱신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한국에서 예멘인은 그 수와 상관없이 ‘난민’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예멘인을 통해 한국 사회도 비로소 난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민이라는 지위나 예멘인이라는 집단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두려움이 무지에서 출발한다. 불필요한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일은 중요하다. 난민법과 난민인권 전문가인 이일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이렇게 말했다.

난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숨길 수 있는 단계는 지났어요. 무엇보다도 난민은 숨어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국내 난민 신청자 수 추이
자료 :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 2018년
251명
1만 6173명
1994-2003년
2010년
2018년

<시사IN>은 4월17일부터 약 두 달간 전국으로 흩어진 예멘인을 찾아 나섰다. 예멘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혐오는 냄새처럼 퍼진다. 글을 모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다수는 만나서 대화할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인터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신원을 공개할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신분이 드러날 경우 예멘에 남아 있는 가족이 처벌받을 위험이 있었다.

난민 인정자 1명, 인도적 체류 허가자 5명,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2명이 어렵게 목소리를 내줬다. 예멘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한국인 자원봉사자와 정부 측 이야기도 들어봤다. 전쟁의 비극을 피해 8000km를 날아온 한국 땅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슬프거나 외로웠던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보낸 1년의 시간에는 환대와 도움의 자취도 켜켜이 배어 있었다. 삶의 기쁨과 기적도 맛봤다. 예멘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친구가 생겼고, 새 생명을 품었고, 연애를 시작하거나 결혼한 이도 있었다. 한국 사회도 이들 덕분에 난민 문제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됐다. 여기 기록한 ‘예멘 난민 1년’은 그 좌표이다.

(인도적 체류 허가)
이동거리 1만 1188km
예멘
오만
인도
말레이시아
제주

모하메드(34)와 리한(29)은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았다. 이웃집이었지만 왕래가 있던 사이는 아니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집안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2015년 1월12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이집트로 다녀왔다.

리한네 집 앞을 지나다니며 그녀가 만드는 음식 냄새는 오래전부터 알았어요.

영문학을 전공한 모하메드는 국영항공사 ‘예메니아 예멘항공’에서 일했다. 내전이 발생한 후 예멘 내 모든 공항이 폐쇄됐다. 전쟁은 직장을 앗아갔고, 목숨도 위협했다. 공습과 강제징집을 피해 결국 예멘을 떠났다. 육로로 사막지대를 통과해 오만으로 갔다. 그곳에서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탔다.

1년 뒤 리한도 인도 뭄바이를 거쳐 쿠알라룸푸르로 왔다. 이곳에서 아들 함자(2)가 태어났다. 함자의 출생등록증 국적칸에는 ‘예멘’, 시민권 칸에는 ‘Non-citizen(시민권 없음)’이라는 단어가 찍혔다. 말레이시아는 난민협약 가입국이 아닌 데다 난민을 위한 정책이 사실상 전무했다. 2018년 5월15일 모하메드 가족은 제주행 에어아시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은 예상보다 훨씬 ‘비싼 나라’였다. 5월 말이 되자 숙박비를 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기를 데리고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제는 ‘한국 어머니’가 된 권경애씨(53)를 이주민 지원 기관인 나오미센터를 통해 알게 됐다. 권씨는 보금자리는 물론 함자를 위한 아기용품과 옷, 장난감도 마련해주었다. 모하메드가 그해 10월 남원읍의 감귤 공장에 일자리를 구하며 이사할 때까지 모하메드 가족은 한국 어머니의 집에 머물렀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예멘인 대다수가 다른 지역으로 떠났지만 세 식구는 제주도에 남았다. 주방이 딸린 원룸에 세간은 단출했다. 모하메드는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감귤 박스를 옮겼다. 감귤이 한창 출하되던 기간에는 밤 12시까지 연장근무를 했다.

감귤 출하 시기가 끝나면서 3월부터는 시간 여유가 생겼다. 한국어 교실에 등록해 일주일에 세 번 왕복 3시간 거리를 버스로 오간다. 한국어 교실에서 글자를 배우는 동안 한국 문화도 익혔다. 5월19일에는 제주의 종교에 대해 공부했다. 유일신인 이슬람과 달리 제주에는 신이 많았다. 산도, 바다도, 나무도, 소도, 돌하르방도 신이 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장바구니를 손에 건 모하메드가 제주시청 근처에 있는 한 대형마트를 찾았다. 무슬림이라고 할랄 식품점만 찾지 않는다. 토마토와 블루베리, 사과, 키위 등이 장바구니에 담겼다. 아들 함자가 먹을 과일이다. 계산을 마친 모하메드가 카카오톡을 열어 리한이 사오라고 한 물품을 빠짐없이 구입했는지 확인했다.

세 식구 중 한국어를 가장 빨리 배우는 사람은 아마 함자일 것 같다. 리한이 가끔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라고 한국말로 탄식을 내뱉으면 어린 함자가 머리에 손을 짚고 엄마를 따라한다.

함자에게 말을 걸어보면 아랍어나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알아듣는 것 같아요.

올해 1월 부부에게 새 생명이 움텄다. 리한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한국어 교실 교사들이 서둘러 건강보험 제도를 알아봤다. 올해부터 인도적 체류 허가자도 직장 및 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5월28일 부부는 제주시내 한 산부인과를 찾았다. 초음파 사진을 통해 태아의 눈과 귀, 다리, 손가락을 봤다. 아기와 엄마 모두 건강했다. 오는 10월 태어나는 둘째 아이는 한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게 된다.

محمد العودري
(난민 인정)
이동거리 1만 4007km
예멘
제주

‘그곳’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한국에 입국한 이후 1년간 나는 안전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튀니지에서 출발해 2011년 아랍을 뒤덮은 ‘아랍의 봄’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예멘 역시 비껴가지 않았다. 2011년 2월 예멘에서도 아랍의 봄이 시작됐다. 나는 이 혁명을 이끄는 주요 청년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나와 동료들의 요구는 매우 간단했다. 우리는 부패와 폭정 대신 자유를 원했다. 그러자 위험이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랍어로 시를 쓰던 나는 작가를 꿈꿨다. 출판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소설도 4편이나 완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랍의 봄을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저널리즘에 눈을 떴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을 기록하고 예멘인이 겪는 고통을 전달했다.

혁명이 끝나고 2014년 후티 반군이 예멘을 장악하기 전까지 이 활동은 내 삶의 대부분이었다. 후티 반군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저널리스트와 미디어 전문가를 위협했다. 혁명은 내전으로 귀결됐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12개국과 ‘아랍 연합’을 결성해 전쟁에 개입했다. 내전은 국제전으로 확대됐고, 더 복잡해졌다.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2015년은 내 평생 가장 위험한 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예멘 내 모든 언론이 ‘망했다’는 것뿐이다. 당시 예멘 내 언론사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폐간하거나, 완전히 후티 반군의 편에 서거나.

그해 8월6일 내가 다녔던 언론사 <올라>는 문을 닫았다. 이날 <올라> 신문사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언론인들이 위험에 빠져 신문 발행을 중단하게 됐다’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이 페이스북 페이지의 마지막 포스팅이었다.

결국 나는 예멘을 떠났다. 아르메니아와 말레이시아에서 1년3개월을 보내는 동안 비자 문제로 예멘으로 돌려보내질 거라는 공포에 떨었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33조 1항은 ‘추방 또는 송환의 금지’를 보장하고 있지만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두려움의 덫에 빠졌다.

2018년 5월5일 배낭 하나만 멘 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친구도, 희망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그저 안전하길 원했다. 나는 제주공항에 도착한 유일한 예멘인이 아니었다. 그해 4월과 5월 사이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예멘인 500여 명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제주도로 왔다. 우리의 불투명한 운명은 난민 신청서를 제출한 후에야 분명해졌다.

나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한국의 세련됨과 교양 속에 섞이고 싶었다. 우리와 관련해 퍼지기 시작한 온갖 루머와 부정적인 뉴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주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내가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우리를 돕기 위해 앞장섰던 한국인들이 보여준 환대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새삼 가르쳐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해 오직 2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412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 지위가 주어졌다. 56명은 그마저도 얻지 못하고 단순 불인정됐다. 이들 중에는 부모와 함께 불인정 결정을 받은 어린이 5명도 포함되어 있다. 제주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는 이들은 제주도에 발이 묶인 채 재심사를 준비 중이다.

한국의 난민정책을 존중하고 한국 정부와 법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단순 불인정 결정을 받은 이들은 안전하게 지내고는 있다. 하지만 옥죄어오는 불안과 심리적 압박 역시 견뎌내고 있다. 나는 아르메니아에서 집필을 시작한 다섯 번째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난민이다.

محمد العودري
(난민 불인정)
이동거리 1만 1217km
<시사IN>은 이스마일 알쿠블라니 기자에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예멘인에 대한 취재와 기사 작성을 부탁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I’m glad to help.”

며칠 뒤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가 도착했다. 그 내용을 정리했다.
예멘
제주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유수프(25)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학하며 의학을 공부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한때 메스를 잡았던 손으로 이제는 채소를 가공한다.

2019년 라마단 기간(5월6일~6월5일) 동안 무슬림들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해가 떨어지고 10시간 넘는 금식이 끝나면 이프타르(금식을 깨는 식사)가 시작된다. 제일 먼저 물을 마시고 ‘데이츠’라고 불리는 대추야자를 먹는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건강에 좋다며 먹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라마단에 금식을 하는 이유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신앙심을 키우는 종교적인 의식이지만, 일과 병행하기에는 무리일 때가 있었다. 유수프는 얼마 전 일을 그만뒀다.

인터뷰를 위해 5월19일 유수프를 만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커피숍에서도 그는 별도의 음료를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멘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7개국 중 유일한 공화국이었지만, 과학 발전 속도와 교육수준이 낮아서 평화를 지키지 못했다는 게 유수프의 분석이었다. 감정을 추스를 겸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유수프가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화장실에 가보니 탈진한 듯 기운이 빠져 있었다. 아이스초코 한 잔을 권했다. 이번에는 유수프도 마다하지 않았다.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예멘인은 3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취업은 할 수 있지만 비자 기간이 짧아 업체에서는 난색을 표한다. 예멘에서의 전공과 능력을 살리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난민 인정을 받은 나조차도 내가 몸담았던 분야인 언론계에서 일을 구할 수 없다.

제주시청 앞마당에서는 5월20일 제12회 세계인의 날을 앞두고 ‘다른 생각, 같은 우리’를 주제로 ‘제주 다민족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인의 날은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근거해 2007년 처음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제주시청 앞에는 축제 기간에 임시로 다문화 거리가 조성됐고, 흰 천막으로 지어진 부스마다 각국의 음식을 판매하느라 북적였다.

제주 시내 한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는 누르(28)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함께 다문화 거리를 방문했다. 누르도 한국으로부터 ‘거부당한 난민’ 중 한 사람이다.

누르 역시 무슬림이라 라마단 기간을 지켜야 하지만 자신의 신앙과 한국 생활을 맞춰가는 중이다.

나 역시 집안의 전통에 따라 무슬림으로 길러졌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종교를 갖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우리는 다문화 거리의 터키 부스에서 케밥을 사서 나눠 먹었다.

누르는 제주에서 보낸 1년을 세 기간으로 나눴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두 달 반 정도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기대 말이죠. 하지만 이내 고통이 시작됐어요. 일도, 집도, 돈도 없는 와중에 난민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세 번째 기간인 것 같아요. 임시 일자리를 구했지만 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슬픔은 가족으로부터 왔다. 난민에게 보장되는 권리 중에는 가족 구성원이 재결합할 수 있는 수단과 편의를 제공받을 권리인 ‘가족 결합 원칙(principle of the unity of the family)’이 있다. 하지만 누르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11개월 된 아들 술탄, 아내 파티마(21)와 한국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됐다.

유수프와 누르처럼 젊은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계획할 수 없고 삶의 지속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질식할 것만 같은 예멘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희생되는 대신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예멘 난민 불인정자들의 희망은 한국 정부와 법이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누르는 한국 정부에 불인정자들의 서류를 다시 꼼꼼히 심사해달라고 호소했다. “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인도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해주시길 고대합니다. 한국인들은 평화롭고 공존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장벽은 언어뿐입니다.”

محمد العودري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난민정책 주무부처이다.

난민 심사를 담당하고, 난민 관련 제도를 총괄한다. 2017년 9월부터 본부를 이끌고 있는 차규근 본부장은 국적·난민 문제 법률 전문가로 변호사 출신이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는 법무부 국적·난민과장으로 일했다.

불과 10년전에 비해 국내 난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2013년 난민법이 제정되면서 난민과가 독립했지만 그전까지는 귀화 업무를 담당하는 국적과와 묶여 있었다. 법무부 국적·난민과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에는 국적 업무가 95%, 난민 업무는 5% 남짓이었다. 2007년에 누적 난민 신청자 수가 1000명을 넘어 보도자료를 냈던 게 기억이 남는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2018년 한 해 동안 약 1만6000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달마다 1000명 이상이 신청한 셈이다. 난민과가 본부에서 제일 나중에 생긴 막둥이 부서인데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장은 제일 크다. 제주 예멘 난민 이슈 이후 더 그렇다.

예멘인 입국 이후 정부의 난민정책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았다. 난민은 인권의 문제지만 인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경 관리, 공공의 안전, 우리 사회의 미래와 관계되는 문제라고 보고있다.

난민 심사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지방 출입국·외국인청에 1차 신청을 하고 불인정 결정이 나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2차 심사는 법무부 난민위원회에서 한다. 거기서도 탈락하면 행정소송을 할 수 있다. 심사 시에는 관계 기관과 공조해서 국내외 범죄에 연루된 사람은 아닌지 꼼꼼하게 검증한다. 예멘인들도 지문 채취까지 했다. 우려가 많았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난민 출신국의 정황은 해외 공관을 통해 입수하기도 하고 레프월드(RefWorld)라는 유엔난민기구의 난민 종합정보 시스템도 이용한다. 소위 난민 선진국이나 인권 선진국은 국가 정황 조사만 하는 별도 팀이 있다. 그런 국가들과도 협력해 정보를 얻는다.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은 29.8%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24.8%이다. 국제적인 수준에 비춰봤을 때 한국이 보호하는 난민 비율은 매우 적은 편이다. 누적 신청자 수가 아니라 심사 종결자를 기준으로 난민 인정률을 구하면 4%이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까지 포함해 보호율을 따지면 12.6%이다. 나라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인정률로만 비교하기는 어렵다. 유엔난민기구 서울사무소도 우리에게 ‘난민 인정률이 낮으니 몇 퍼센트로 높여라’는 식으로 권고하지 않는다.

유엔난민기구 서울사무소가 권고하는 사항은 무엇인가. 난민 심사제도와 절차를 보완하라는 내용이다. 통역 지원 등 심사 과정에서 난민 신청자가 제대로 호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난민 업무 심사관의 전문성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해서 유엔난민기구와 연계해 담당 직원 교육을 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2개월에 한 번씩 교육받고 올해부터 심사관들은 연 50시간 이상 의무교육을 들어야 한다. 지난해까지 난민 심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전국적으로 39명뿐이었다. 올해는 통역 5명을 포함, 91명으로 보강됐다.

한 해 난민 지원 예산은 어느 정도인가. 예멘 난민 생계비 지원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많았다. 2018년 생계비 지원 받은 이들은 모두 625명으로 예멘인 중에 생계비를 지원받은 사람은 20여 명이다.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지원하는데, 인도주의 측면 외에도 난민 신청자가 생계 곤란으로 범죄에 노출되는 것을 예방하여 우리의 안전을 확보하는 성격도 있다. 평균 지급 기간은 3.3개월이고, 최장 6개월까지만 지급이 가능하다. 올해 난민 예산은 29억원인데 그중 생계비 예산은 7억9000만원 정도다. 29억원은 통역, 난민위원회 운영비, 의료비, 생계비가 모두 포함된 액수다.

다문화 사회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다. 이질적인 문화권 출신을 만났을 때 경계심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외국인이 일정 퍼센트 이상 되면 반감이 나타난다. 반대 여론을 단순히 ‘이상하다’ ‘비이성적이다’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국민과 이주민 사이 갈등을 잘 관리하면서 오해를 바로잡고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넓혀가야 한다.

محمد العودري
(인도적 체류 허가)
이동거리 1만 7258km
예멘
말레이시아
제주
목포

“앗살라무 알라이쿰.” 전남 영암군 현대삼호 사원아파트 앞에서 라만(27·가명)을 마주친 주민 한 명이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는 한국어를 듣기가 쉽지 않다. 비상대피 안내도와 관리사무소의 안내문도 영어와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있다. 4개 동으로 이루어진 1차 아파트는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숙소다.

사원아파트이지만 회사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지난 3월에 오자마자 자전거 한 대를 마련했다. 회사까지는 걸어가면 40분 정도, 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면 10분 정도 걸렸다. 라만은 현대삼호중공업 하청업체에서 전기 배관 만드는 일을 한다. “아직은 용접을 하는 보스를 옆에서 돕고 있어요.”

최근 들어 불면증이 심해졌다. 불면증의 원인 중 하나는 아내다. 라만은 2017년 아내와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후티 반군의 징집을 피해 예멘을 떠나야 했다.

예멘과 한국의 시차는 6시간. 아내와 밤늦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을 때가 많다. 채팅방에는 하트 이모티콘이 가득했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아내가 정말 보고 싶어요.”

지난해 10월 난민 심사 결과가 발표 되고 착잡했다.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가족을 데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출도 제한이 풀렸지만 어디에 가서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목포로 갔던 다른 친구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 “숙식은 문제없어. 다른 예멘인도 많아.”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는 7000여명, 그중 이주노동자가 1000명에 달한다. 중국동포 200여 명을 포함해 고려인·우즈베키스탄·베트남·네팔 등 출신이다. 라만을 비롯해 현재 예멘인 100여 명이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선박 페인트칠, 도료 배합, 용접, 선체 녹 벗기기 등을 하고 있다.

이곳에 예멘인이 늘어나가 시작한 건 지난해 말부터다. 당시 현대삼호중공업 협력회사협의회에 소속된 협력회사 대표 7명이 예멘인을 채용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와 취업설명회를 열었다. 내국인을 채용하고 싶어도 기피하는 일자리라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다.

업무 강도가 높고 잔업도 많지만 G-1(기타, 난민 신청자) 비자 소지자가 주로 가는 일자리에 비해서는 복지가 좋았다. 식사에는 할랄 음식이 포함돼 있고, 1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기도실도 회사 내부에 있다. 업무 시간이 끝난 저녁에는 회사에서 한국어 수업도 열어줬다.

하지만 현대삼호중공업 홍보팀 직원은 취재에 응하면서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예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워낙 많다 보니까 혹시라도 여기 와서 시위를 한다든가, 이들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걱정됩니다.

“사람들이 과정은 안 보고 결과만 보거든요. 우리도 내국인 고용 창출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건데… 기사를 읽는 분들은 ‘외국인이 내국인 일자리 차지했다’는 식으로 생각할까봐 곤혹스럽습니다.”

실제 계약을 맺은 건 하청업체인데 회사마다 계약 조건은 조금씩 달랐다. 라만의 출입 카드에는 하청업체인 OO산업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니는 회사 이름을 아느냐고 묻자 라만이 작업복에 새겨진 문구를 보며 말했다. “현다이, 빅 컴퍼니.”

숙소 바로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날씨가 맑아 현대삼호중공업 조선소의 크레인 수십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라만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바닷가를 찾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통돌이 세탁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7명이 함께 살다 보니 휴일에는 온종일 빨래를 해야 한다. 방 한쪽에는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때 묻은 회색 작업복이 잔뜩 쌓여 있었다.

محمد العودري
(인도적 체류 허가)
이동거리 1만 1217km
예멘
말레이시아
제주
오산
기흥

전쟁으로부터 8000km를 도망쳐왔지만 전쟁은 그의 손에서 여전히 울렸다. 와츠앱 메신저를 열자 1897개의 알람이 떠 있었다. 알리(37·가명)가 엄지손가락으로 채팅방을 눌렀다. 현지 상황을 공유하는 채팅방에 어제오늘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쭉 나열돼 있었다.

5월16일 수도 사나의 한 건물이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다. 메신저가 평소보다 더 시끄러웠다. 누군가 폭파된 현장에서 찍어 올린 사진 가운데 온몸에 잿더미를 뒤집어쓴 아이 다섯 명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이래서 내가 이 채팅방 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니까요. 내 친구나 가족이 있을까봐 잘 열어보지 못해요.

알리의 아내와 두 딸은 아직 예멘에 남아 있다. 2주일 전에는 그의 가족이 머무는 숙소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알리가 예멘을 떠날 때쯤 태어난 둘째 딸은 벌써 세 살이 되었다.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는 예멘에서 공학과 법학을 전공한 뒤 공화국 수비대(Republican Guard) 군인으로 일했다. 공화국 수비대는 2012년 물러난 살레 전 대통령이 창설한 군이었다. 2015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티 반군은 예멘군의 본거지를 찾아다니며 공격했고, 예멘군은 공화국 수비대를 전 독재정권의 유산으로 간주해 군으로 복귀하는 이들을 탄압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예멘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참전하지 않은 군인은 예멘 군형법상 사형에 처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때마침 ‘카톡’ 알람이 울렸다. “내일은 4시30분입니다.” 알리의 팀장이 출근 시간을 공지하는 메시지였다. 알리는 능숙하게 “예” 하고 답장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건설 현장에서 안전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뒤 경기도 기흥으로 올라와 찾은 일자리였다. 5월19일에는 서울 강서구의 오피스텔 건축 현장으로, 5월20일에는 전북 익산의 공장 부지로 일터가 매번 바뀌는 식이다.

일은 위험하다. 한국인 2명, 예멘인 2명이 팀을 이뤄 5m부터 40m짜리까지 미리 설치된 철근 구조물 위에서 초록색 추락방지망을 층별로 고정한다. 얼마 전에는 손이 미끄러져 2m 높이에서 떨어졌다. 알리는 한국어로 “이제 괜찮다”라며 멋쩍게 웃었다.

예멘인 가운데는 여러 일터를 전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비교적 빨리 정착했다. ‘잘리지만 않는다면’ 일을 계속하고 싶다. 일요일마다 수원 이주민센터에서 2시간 동안 한국어 수업도 듣고 있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요.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어요.

알리는 지난 4월 만들어진 예멘 난민 축구팀 창단 멤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개신교 기반 비영리 단체 ‘예멘 친구들을 위한 사마리안들(사마리안들)’이 마련한 수원의 쉼터에서 주말이면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한국어를 배우던 예멘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팀이다. 알리를 비롯해 ‘예멘 난민팀’은 2~3주에 한 번 사마리안들의 주선으로 다른 팀과 경기를 한다.

이들에게 축구는 한국 사회와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다. 경기 때마다 수원과 용인, 충북 온양 등지에서 축구팀 11명을 채우고도 남을 예멘인이 모인다. 예멘에서 축구 클럽에 소속됐었던 선수 출신도 있어 대부분 예멘 난민팀의 무난한 승리로 끝나곤 한다.

물론 늘 이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전북 완주 등 지방에 사는 팀원의 기차 시간을 맞추다 보면 9명이나 10명만 경기를 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주에서 난민 심사를 기다리던 지난해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였다.

محمد العودري
(제주도 한국어교실 교사)
제주

일주일에 한 번, 예멘에서 온 친구들의 한국어 수업에 갑니다. 이 문장을 편한 마음으로 말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제주에 입국한 예멘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보니 가족에게도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제주 내 작가들과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며 지내다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이토록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전에는 몰랐다. 나와 가족, 개인 작업과 살림 이외의 활동이 매우 피곤했다.

예멘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곳에서 다들 너무 힘들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참석한 모임에서 2018년 7월부터 예멘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신호처럼 다가왔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갈증 탓이었을까. 간만의 외부 활동이 기다려졌다. 지난해 10월2일 첫 수업을 시작했을 때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어정쩡한 태도로 선생의 자리에 서 있는 나에게 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극한 태도로 반겨주었다. 그런 무조건적인 기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수업은 어떤 순간도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보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는 뭐라고 하면 돼요?” “나는 코리안 알파벳을 먼저 배우고 싶어요” 등 모든 상황과 말이 섞여 아수라장이었다. 누가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시간만 빠르게 지나갔다.

식은땀 흘리며 수업을 마친 내게 그들은 ‘말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말릭은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담스러워서 쓰지 않았더니 최근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샤허드’, 절벽에서만 나는 품질 좋은 꿀의 명칭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었다.

일터나 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국어 표현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짰다. 수업에 참여했던 친구 두 명이 거리에서 갑자기 구타당했던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 요청하는 법, 오해를 푸는 법, 예멘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법 등 한국인의 정서와 태도에 맞춘 말하기를 중점적으로 수업하기도 했다.

무언가 계속 부족한 느낌이었다. 준비한 수업을 잘 전달하고 온 날도 그랬다. 모하메드, 무하메드, 무함마드처럼 실제로 같은지 다른지조차 모르겠는 비슷한 이름도 너무 많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몇 번의 수업이 지난 뒤에야 ‘난민’이라는 집단이 아닌, 단 한 명밖에 없는 ‘친구’로 다가왔다.

수업 시간이 즐거워지면서 아쉬움도 그만큼 커졌다. 함께 동화책을 만들자고 예멘 친구들을 붙잡았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적고 그림을 그렸다. 그사이 제주를 떠나는 친구가 많아지면서 책 형태로 마무리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진솔하게 적어준 이야기는 잘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꼭 책 형태로 엮어서 함께 읽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동화책 만들기 수업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암젯(32)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를 MJ라고 편하게 불렀다. MJ는 예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게 된 MJ가 일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나는 한국어가 서툰 그의 면접에 함께 따라가 주기도 했다. 면접 동행을 계기로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집 앞 공원 놀이터에 아들과 다른 친구, MJ와 산책을 나갔던 지난 2월의 어느 날이었다. MJ와 아들이 함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어떤 음악을 들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예멘 음악은 뭐가 있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침 내겐 나라별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다. 앱을 실행하니 세계지도가 화면에 가득찼다. 나는 MJ에게 예멘이 어디쯤 있는지 물었다.

MJ의 손가락을 따라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을 넘어 이란과 이라크를 지나니 예멘이 보였다. 나는 스크린에 뜬 예멘 지도에 손끝을 갖다 댔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예멘의 오래된 아주 유명한 노래라고 했다.

아들이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다가 놀이기구 안으로 들어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손 흔드는 아이를 바라보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MJ도, 함께 있던 내 친구도 나를 보며 크게 웃었다.

MJ는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모든 친구는 당연히 새로운 한 사람이니, 당연히 나도 MJ같은 친구는 처음이었다.

MJ는 현재 강원도 원주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한다. MJ는 제주를 떠났지만 우리의 한국어 수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محمد العودري
(인도적 체류 허가)
이동거리 1만 7894km
예멘
벨라루스
말레이시아
제주
서울

제주 예멘 난민 심사가 완료된 지난해 12월 이후 서울로 온 예멘인 일부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림동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대다수 예멘인의 법적 지위인 인도적 체류 허가자가 소지한 G-1-6 비자를 환영하는 곳은 매우 드물었다. ‘일자리 많은 곳’이라고 써붙인 직업소개소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개소의 대표는 “냄새 나서 소개 안 한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물론 예멘인에게 동정적인 곳도 있었다.

“그 친구들 갈 만한 일자리가 없어서 큰일이에요. 브로커가 접근해서 취업 사기로 돈 떼인 이들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우리가 위험해지거든요.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나라가 배려해서 취업을 좀 시켜야 할 텐데.”

드물게 난민을 선호하는 업체도 있다.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쓸 수 있는 인원이 한정돼 있어 예멘인 같은 난민을 원하기도 한다. 난민을 혐오하는 이들도, 동정하는 이들도 한 목소리를 낼 때가 있다. 난민이 없으면 문 닫을 공장이 많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위험하고, 더럽고, 많이 다치고 죽는 데 있잖아요. 3D 업종. 그런 데는 이주노동자들도 안 가려고 하거든.

“ 불법체류자는 잘못 썼다가 걸리면 큰일 나니까 사장들이 못 쓰고. 그런 업체는 G-1 비자를 선호하죠. 돼지우리 같은 기숙사에 8~10명씩 집어넣어도 말을 안해요. 못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 없으면 한국 경제 망해요. 공장 다 문 닫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서울에 왔던 야스민(29)도 대림동을 찾았던 예멘인 중 한 명이었다. 직업소개소 가운데 한 곳에 영어 소통이 가능한 상담원이 있었다. 상담원은 외국인등록증부터 확인했다. “일이 하나 있는데 히잡을 벗어야 해.” 야스민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 곳이 더 있었지만 그곳도 ‘NO 히잡’이었다.

“한국에서 살고 싶으면 히잡을 벗어야 해. 계속 히잡을 쓰면 아무도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텐데. 한국의 룰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야스민에게 히잡은 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이게 제 모습이에요. 아랍인, 예멘인, 무슬림 여성으로서요. 이걸 벗으면 제 일부를 잃는 것과 다름 없어요.”

야스민은 예멘에서 초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징집될 위험은 없었지만 전쟁은 그의 미래를 앗아갔다. 공습이 이어지며 학교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지쳤다.

2018년 4월경 제주로 입국하는 예멘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건 ‘배우 이민호’ ‘두부’ ‘불교’ 정도였다. 두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짐을 쌌다. 2018년 5월30일 ‘체류 지역 범위:제주특별자치도’라고 쓰인 파란색 도장이 야스민의 여권 내지에 찍혔다.

“한국에 왜 왔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가장 난처했다. 안쓰러워하는 눈빛도, 무시하는 태도도 모두 달갑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야스민은 기회가 닿는 대로 난민 당사자로서 사람들 앞에 섰다. 시민단체, 대학, 교회 등에서 예멘 상황을 알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히잡은 왜 써요?”

“왜 다른 나라로 가지 않았어요?”

“돈 벌러 온 거 아니에요?”

악의가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질문은 반복됐다.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한 청중으로부터 ‘테러리스트가 아니란 걸 증명해 봐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야스민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됐다. 그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첫 번째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이태원에 있는 바라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태원 근처에 사는 무슬림 여성과 아이들의 교류를 위해 2018년 6월 개설된 쉼터였다.

운 좋게도 도서관 운영자가 야스민에게 영어와 아랍어를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했다. 영어는 난민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아랍어는 한국어 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업했다. 일주일에 두 번뿐이지만 초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그에게는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찾는 순간”이었다.

지난 3월부터는 일주일에 사흘간 난민 지원 단체인 MAP(아시아 평화를 위한 이주)로 출근한다. 영어를 못하고 아랍어만 쓰는 난민들을 돕는다. 한국어를 몰라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거나, 병원을 찾지 못해 병세가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며 활동가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이제 고작 3개월밖에 안 되어서 부족한 게 많지만요.”

불투명한 미래가 자꾸만 야스민의 무릎을 꺾는다. 인도적 체류 허가도 4개월 뒤면 기한이 끝난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1년마다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외국인등록증을 볼 때마다 ‘G-1’이라는 글자가 못내 미웠다. D-2(학생 비자)나 D-4(일반연수 비자)였다면 덜 막막했을까. “한국에서는 제 미래가 잘 상상돼지 않아요.” 야스민이 자꾸만 외국인등록증을 만지작거렸다.

محمد العودري
(인도적 체류 허가)
이동거리 1만 1543km
예멘
말레이시아
제주
서울
오산
인천
화성
원주
수원

쉬는 시간이 되자 어디선가 ‘뽕짝’이 흘러나왔다. 빨간 양념이 묻은 고무장갑을 낀 압둘라(23)가 슬슬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하얀색 위생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껏 힘을 줘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모 하드, 최고예요!

압둘라가 손뼉을 여러 번 치면서 말했다. ‘하드’는 아랍어에서 복수형을 만드는 접미사다. 김치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모들’을 압둘라만의 방식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압둘라가 지난 4월12일 강원도 원주 김치 공장에서 찍은 2분 남짓 영상 속에서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가 이 공장에서 일한 기간은 한 달이었지만 스스럼없는 성격 덕에 정이 많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영상을 자주 꺼내보게 된다.

1년간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지난해 6월에는 고기잡이배를 탔다. 난생 처음 본 바다 위에서 14시간씩 일하며 구토를 견뎠다. 11월에는 시멘트 공장에서 포대를 나르고, 12월에는 제과 공장에서 캐러멜 반죽을 만들었다. 어디서나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일 자체가 쉬웠던 적은 없었다. “힘들어요” “피곤해요”라는 한국어를 제일 먼저 익혔다.

압둘라는 전쟁이 터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2016년 참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후티 반군에 여러 번 붙잡혔다. 8월12일과 10월9일.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 짐을 싸서 공항으로 오던 날도 잡혔다. “우리와 함께 총을 들거나 돈을 내라.” 200달러(약 24만원)를 내고 겨우 풀려났다.

2013년쯤 유튜브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꼭 한번 여행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주6일을 일하다 보니 영상 속에 나왔던 명소를 찾아갈 시간 여유가 없다. 대신 쉬는 날에는 ‘얄라코리아(YallaKorea)’라는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을 본다. 한국인이 아랍어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채널이다.

그가 자신의 유튜브 피드를 좀 더 내리자 건물이 무너져 아수라장이 된 영상이 이어졌다. 수도 사나 지역에서는 5월에만 수차례 폭탄 소리가 들렸다. 전쟁으로 죽어나가는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한국도 전쟁을 겪었다는 걸 알고 슬펐어요. 이런 일이 이곳에서도 있었다는 거잖아요.”

얼마 전 한국에서 다섯 번째 직장을 얻었다. 지난해 10월 충북 오산에 예멘인 쉼터를 열었던 홍주민 목사가 난민들의 취업과 자립을 돕기 위해 수원에 개업한 ‘YD 케밥하우스’다. 예멘에서 부모의 식당을 도왔던 경력을 인정받아 요리사로 고용됐다. 물론 ‘연수’도 따로 받았다. 5월10일부터 사흘간 평택 미군 기지 앞의 한 케밥 가게에서 고기 써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케밥 그릴 기계가 내뿜는 열기로 두 평 남짓 주방이 금세 후끈해졌다. 토르티야 4장을 연이어 깐 뒤 미리 잘라둔 고기와 양상추, 당근, 토마토를 흩뿌렸다. 장사가 끝나려면 3시간도 넘게 남은 시간, 어느새 준비했던 케밥용 고기 한 통이 다 팔렸다.

“이제 그만하고 좀 쉬자.” 홍 목사의 만류에도 압둘라는 기어코 다른 한 통을 꺼내 그릴에 꽂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요. 괜찮아요. 더 할 수 있어요.” 압둘라의 첫 식사는 8시30분이 넘어야 겨우 가능했다. 제과 공장과 김치 공장의 이모들에게 취업 소식을 전했다. “꼭 먹으러 갈게”라는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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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km를 날아온 낯선 질문: 예멘 난민 1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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